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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베란다 문을 열면 꽉 막힌 차량 행렬이 보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저도 요즘은 슬그머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노년은 좀 다른 곳에서 보내고 싶다'고. 그런데 막상 알아보려니, 어디가 좋은지보다 '무엇을 기준으로 봐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2036년이면 국민 3명 중 1명이 노인이 되는 나라에서, 살 곳을 고르는 기준부터 다시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고령화 속도, 우리가 직접 겪어야 할 문제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한국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데 걸린 시간이 단 7년이라는 사실을요. 일본은 10년, 독일은 36년이 걸렸는데,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늙어가는 나라가 됐습니다(출처: WHO 고령화 정책). 1964년부터 1974년 사이에 태어난 2차 베이비붐 세대만 954만 명인데, 이 분들이 앞으로 10년 안에 모두 60~70대에 접어듭니다.
제가 서울에서 평생을 살면서 집을 고를 때 따졌던 기준은 늘 비슷했습니다. 직장까지의 거리, 아이 학교, 대형마트 접근성. 그런데 은퇴 이후의 삶에서는 그 기준들이 통째로 사라집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학교도, 직장도 아닌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살 곳을 고를 수 있는 자유가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함정이 생깁니다. 30대의 눈으로 60대 이후의 집을 고르는 실수를 하게 된다는 거죠.
저도 막연히 '지방 어딘가,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직접 정보를 모아보니, 지방의 의료 사막화가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병원 하나 가려면 차로 30분 이상 걸리는 곳이 수두룩합니다. 편안한 노년을 꿈꾸다가 의료 접근성 문제로 발목이 잡히는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자료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이동성과 기후, 노년의 삶을 좌우하는 숨은 변수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노후 도시를 고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값이나 자연환경만 봅니다. 그런데 실제로 노년의 삶을 결정하는 건 훨씬 구체적인 두 가지 변수였습니다. 바로 이동성과 기후입니다.
먼저 이동성 이야기입니다. 고령자 면허 자진 반납률이 2.3%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노인이 80세까지는 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운전을 멈추게 되는 건 법이 강제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판단력이 흐려졌음을 느낄 때입니다. 운전대를 내려놓는 순간, 차에만 의존하던 삶은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우울증, 인지 기능 저하, 사회적 고립이 연쇄적으로 따라옵니다.
여기서 '15분 도시(15-minute city)'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15분 도시란, 집에서 걸어서 15분 안에 병원·마트·공원 등 일상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진 도시 구조를 의미합니다. 언뜻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노인의 관점에서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홍콩에서 진행된 고령자 보행 연구에 따르면, 실제 노인들의 도보 통행은 대부분 5~12분 안에 끝납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감당하는 거리가 줄어드는 겁니다. 15분이 아니라 5분이 실질적인 단위가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도상으로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여도, 5cm짜리 연석 턱 하나 때문에 휠체어나 보행기가 막혀버립니다. 노년의 도시를 평가하는 진짜 기준은 반경이 아니라, 집 앞 5분 안에 연석 턱이 깎여 있는지, 중간에 앉을 벤치가 있는지, 겨울에 빙판 방지가 돼 있는지 같은 손에 잡히는 디테일입니다.
두 번째 변수는 기후입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자료에 따르면 폭염 사망자의 39%가 65세 이상입니다(출처: 미국 CDC 폭염 건강 정보). 노인은 땀과 갈증을 잘 느끼지 못해 위험 신호를 스스로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2003년 파리 폭염 사례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낮 기온보다 밤 기온과 건물 밀도가 사망률과 더 깊은 관계가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콘크리트가 밀집된 고밀도 아파트 단지는 낮에 흡수한 열을 밤까지 내뿜는, 이른바 열섬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열섬 효과(urban heat island)란, 도심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낮 동안 열을 축적했다가 밤에도 방출해 도시 기온을 주변보다 높게 유지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10년 후 좋은 도시가 갖춰야 할 기후·이동 조건
- 밤에 잘 식는 저밀도 주거 환경 또는 도시 공원 근접성
- 집 앞 5~10분 이내 연석 턱 제거, 벤치, 그늘 확보
- 겨울철 히트쇼크(실내외 급격한 온도 차로 인한 혈압 이상) 예방을 위한 단열·난방 환경
- 차 없이도 병원·마트·커뮤니티에 접근 가능한 대중교통 인프라
- 자율주행 셔틀 등 찾아오는 서비스 연계 가능성
지금 사는 동네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는 법
제가 직접 자료를 뒤져봤는데, 해외의 사례들이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이었습니다. 일본 도야마시는 압축 도시(compact city)의 세계적 모범 사례로 꼽힙니다. 압축 도시란, 흩어진 도시 기능을 대중교통 축으로 한데 모아 걷거나 전철로 모든 생활을 해결할 수 있게 재편한 도시 구조입니다. 도야마는 노면 전차 노선을 따라 주거 지역을 배치하고, 승강장과 차량 바닥 높이를 같게 맞춰 노인이 단 하나의 턱도 없이 탑승할 수 있게 설계했습니다. 65세 이상에게 외출 패스를 발급한 뒤 노인들의 하루 걸음 수가 평균 2,150보 늘었고, 이는 연간 수억 원의 의료비 절감으로 이어졌습니다. 도시 구조가 노인을 밖으로 이끌어내느냐, 집 안에 가두느냐가 의료비까지 바꾸는 겁니다.
싱가포르의 캄풍 애드미럴티(Kampung Admiralty)는 노인 아파트, 의료 센터, 공원, 어린이집을 한 건물 안에 복합적으로 배치해 2018년 세계 건축 축제에서 '올해의 건물상'을 받았습니다. 다만 제가 보기엔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고령자 주택이 100세대에 불과했고, 젊은 가족이 섞이지 않아 세대 통합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노인만 모아두면 또 다른 격리가 됩니다.
세계 노후 주거의 가장 큰 흐름은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입니다. 에이징 인 플레이스란, 요양원이나 실버타운으로 이사하는 대신 살던 동네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받으며 늙어가는 개념입니다. 한국의 1기 신도시, 즉 분당·일산·평촌 같은 곳이 이미 NORC(자연발생적 은퇴 커뮤니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NORC란 처음부터 노인용으로 설계된 것이 아닌데 자연스럽게 노인이 다수가 된 동네를 뜻합니다. 서양은 이를 문제가 아닌 자원으로 보고, 기존 아파트에 돌봄 서비스를 얹는 방식으로 활용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서울, 그리고 노후에 가볼까 싶었던 순천이나 원주도 이 눈으로 다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남 순천은 건강 보건 및 주거 환경 지표에서 상위권에 오른 도시이고, 강원도 원주는 2028년 세브란스 분원 개원을 앞두고 강원 중부권 의료 허브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도시 이름이 아니라, 그 도시를 보는 기준입니다. 네덜란드의 호그벡(Hogeweyk) 마을처럼, 기억이 흐려진 치매 노인을 가두지 않고 일상적인 동네 안에서 품을 수 있는 곳이 진정한 노년 친화 도시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노후에 지방으로 가는 게 무조건 좋은 건가요?
A. 저도 처음엔 조용한 지방이 답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알아보니 지방의 의료 사막화가 상당히 심각합니다. 어떤 지방인지, 의료 접근성·대중교통·커뮤니티 인프라가 어떤 수준인지를 따져야 합니다. 도시 이름보다 그 도시를 보는 기준이 먼저입니다.
Q. 15분 도시면 노인이 살기에 충분하지 않나요?
A. 15분 도시(15-minute city)는 좋은 개념이지만, 노인에게는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고령자 보행 연구에 따르면 노인의 도보 통행은 대부분 5~12분 안에 끝납니다. 지도상의 거리보다 실제 보도 환경, 즉 연석 턱이 깎여 있는지, 중간에 쉴 벤치가 있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Q. 에이징 인 플레이스가 뭔가요? 그냥 안 이사하는 거 아닌가요?
A. 단순히 안 이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란 살던 동네에서 돌봄·의료·이동 서비스를 끌어들여 노년을 보내는 전략입니다. 이사 대신 지금 사는 공간을 노년 친화적으로 바꾸는 것이 핵심이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노후 주거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Q. 운전을 그만두면 정말 그렇게 삶이 달라지나요?
A. 생각보다 훨씬 큰 변화가 옵니다. 고령자 면허 자진 반납률이 2.3%에 불과한 건, 운전을 멈추는 순간 삶의 반경이 갑자기 쪼그라드는 현실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운전에만 의존해 살던 사람이 갑자기 차를 못 쓰게 되면 우울증·인지 기능 저하·사회적 고립이 연쇄적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사는 동네가 차 없이도 생활 가능한지를 미리 점검해야 합니다.
결론
아침마다 서울 베란다 밖의 차 막힘을 보며 '언젠가는 떠나야지' 생각했지만, 막상 어디로, 어떤 기준으로 가야 하는지는 한 번도 제대로 따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자료를 모아보며 분명해진 게 하나 있습니다. 좋은 노후 도시는 집값이나 자연환경이 아니라, 운전대를 내려놓는 날에도 두 발로 5분을 걸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 한여름 밤에도 잠들 수 있는 곳, 기억이 흐려져도 가두지 않고 품어주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도시는 멀리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는 것, 고령 친화 도시 인증 배지보다 직접 거리를 걸어보며 연석 턱이 깎여 있는지 확인하는 것, 그것이 10년 후 노년의 삶을 바꾸는 첫걸음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올해 안에 지금 사는 동네를 그 눈으로 한 번 천천히 걸어볼 생각입니다.